미국으로 포닥을 온지 한달이 지났다. 실은 한달하고도 2주가 더 흘렀지만 살면서 가장 분주했던 2주는 없었던 시간처럼 느껴진다. 미국의 주민등록증이자 Social Security Number 발급부터 해서, 입을 옷을 마련하고, 지속가능한 식사 루틴을 짜고,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살 장소까지. 정말 많은 일들을 해냈다. 한국에 있으면서 당연하게 누렸던 편의점, 지하철, 은행 시스템들이 이토록 그리웠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정보가 부족했던 과거에, 혹은 더 어린 나이에 미국에 와서 정착하고, 유학을 하거나 연구를 이어간 내가 아는 사람들이 더욱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한달을 보내면서 나도 조금은 대단해졌을까.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 갖추어졌으니, 이 다음 고비는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하는 태도나 너무 사소해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사회적 약속, 사람을 대하는 문화 등에서 많은 충돌을 겪을 것을 각오하고 있다. 현재 연구실에는 나와 PI 밖에 없기 때문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충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과거 시끌벅적했던 연구실을 떠올리면 지금이 더 심적으로 안정적이지만, 다가오지 않은 학습의 시간들은 나로 하여금 폭풍 전야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때문에 '외국인'이라는 틀을 깨고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가져보려고 노력을 하는데 정말 쉽지가 않다. 오늘은 초자아의 부단한 노력으로 극도로 내향적인 자아를 모르는 교수님 연구실에 질질 끌어넣는 것을 성공했다. 덕분에 바로 옆 연구실 사람들을 소개받고, 앞으로 인사를 주고받을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오늘따라 극도로 피로함을 느끼는 것은 아마 엉망이 된 자아 때문이지 않을까. 미안하다 야.
2주 전 즈음인가 외부 연사 초청이 있다고 관심있는 포닥/학생들에게 점심/저녁 식사 자리 제안이 왔다. 둘다 시간이 된다고 말을 해뒀는데 어쩌다보니 점심/저녁 모두에 참석하는 사람이 되었다. 오늘 알고보니 이런 자리는 5명 내외의 소규모로 진행이 되는 식사자리고 상당히 어색할 수도 있다는 말을 PI에게 들었다. 이제와서 발을 빼기에는 늦었다. 회복을 못한 내향성은 한번 더 고통을 받을 것 같다. 이렇게 자주 고통을 받다보면 조금씩 성장하지 않을까? 언제까지고 모니터 뒤에 숨어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피로감 때문인지 연구라는 행위 자체에 회의감을 살짝 느꼈다. '연구란게 이렇게 힘들면서까지 해야할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도 매일 저녁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오늘 한 일에 대한 작은 뿌듯함과 앞으로 할 연구에 대한 두근거림을 느낀다. 이것으로 충분할까? 오랫동안 날 앞으로 이끌어줄 연료가 되어줄까? 아마 가치관을 정립한 것은 좋은데, 가치관에 기반한 구체적인 목표를 정립하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가치관이 있으면 아예 경로를 벗어나더라도 바른 길로 갈 수 있지만, 작은 하루하루의 deviation 에는 구체적인 목표가 필요할 것 같다. `내가 해야한다` 보다는 더욱 더 강한 동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