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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함께한 타카마츠 여행기
백수 기념(?)으로 아버지와 타카마츠로 여행을 다녀왔다. 외래어 표기법상 다카마쓰가 맞지만 현지 지도에서 da ka ma su로 일본어를 쳤다가 혼란에 빠진 일이 있었기에 원래 표기 たかまつ (takamatsu)로 계속 언급하겠다. 작년 스페인 여행에서 영원한 여행메이트 아버지와 어려움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큰 기대를 안 하고 출발을 했다. 도시 자체도 시골이기도 하고 유유자적 돌아다니면 되겠다 싶어서 상대적으로 부담감이 덜한 여행이었다.
타카마츠는 일본의 크게 4개의 섬 중 가장 작은 시코쿠(四国) 섬 북쪽에 위치해 있다. 왜 4국인가 했더니 과거 4개의 나라가 있었기에 그리 불린다고 한다. 특히 가장 큰 중앙섬인 혼슈(本州)와 가장 가까운 곳을 '세토 내해'라고 하는데, 한국의 남해안처럼 섬들이 많은 지형이고 물류의 중심으로도 기능했다고 한다. 태평양을 바로 마주 보고 있지 않아서 그런지 바다도 잔잔한 느낌이었다.
0일 차
타카마츠의 주 관광상품은 이 세토 내해에 속해있는 다양한 섬들과 우동이다. 마침 우리가 가는 시즌에 세토내해 트리엔날레라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가타가나만 보고 '트리엔.. 뭐?' 했는데 원래부터도 모르던 단어였다. 3년마다 개최되는 예술제라 트리엔날레라고 한다는데 2년마다 개최되는 비엔날레를 떠올리면 '아하~'하게 되는 대목이다. 특히 일본의 유명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건축물과 작품들이 섬 곳곳에 흩어져 있어서 이를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고 한다. 올해 개최되는 예술제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무료로 들어갈 수 있는 예술제 여권을 팔았다. 4,500엔의 가격이었는데 하나하나 예약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보다 이쪽이 나을 것 같아서 여권을 구입했다.
두 번째로 유명한 것은 타카마츠 바로 옆에 붙어있는 '사누키', 사누키 우동이다. 각종 여행 정보지와 블로그를 찾아보고 내린 결론은 '사누키 우동 = 평양냉면'이다. 평양냉면이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어디가 면발이 어떻고 국물의 염분이 어떻고, 여긴 반죽을 어떻게 하고 등등 미묘한 맛을 즐기며 소비된다. 그러나 자극적인 맛에 익숙해진 많은 사람들에게는 '행주 삶은 물에 말아주는 국수'라고 치부되기도 한다. (지금은 평양냉면이 가끔 생각날 정도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첫 만남에 저 표현보다 더 정확한 말을 못 들었다) 그래서 슴슴하니 집집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는 음식이라는 마인드셋을 장착하고 출발했다.
공항 안 안내 데스크에서 예술제 여권을 구입한 뒤 시내로 이동하니 오후 6시 반이 되어 있었다. 우동을 제외하고는 오사카처럼 특별히 유명한 음식이 있지 않아서 아버지와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로 했다. 처음 방문한 곳은 덴뿌라 전문점 大銀.
가격이 1,500엔 대로 싸서 살짝 의심을 했는데, 재료는 신선했다. 자주 가는 신주쿠 덴뿌라집과 비교하면 납득이 가는 맛이었다. 관광객들이 상당히 많이 오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가게들은 대체로 현지인 위주로 돌아가는 인상이 많았다. 여기도 딱 봐도 일본어 못할 것 같은 외국인은 사전 예약제라면서 쫒아내더라.
2차로 갈 곳을 찾는 도중, 덴뿌라 집을 찾아갈 때 현지인들이 잔뜩 줄 서 있던 곳을 발견했어서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는 이전에도 드셔보신 적이 있다고 하신 요리인데, 아버지의 이번 여행의 주목적 중에 하나였다. 닭다리를 뼈째 구워서 한쪽 면을 바싹 익혀서 주는 닭 요리, 호네츠키토리이다. 곳곳에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가기 전에 새로운 가게를 시도하지 않고 다시 이 가게로 왔을 정도로 만족할만한 맛이었다. 또 온다면 무조건 재방문할 집.
3차로는 나 혼자 밖에 나왔다. 술도 거하게 마신 상태로 휘청거리며 특색 있는 가게를 찾다가 조용한 사케집을 발견했다. 외관상으로는 토킹바의 분위기가 물씬 났고, 가게 안에 들어가서 5분가량은 비슷한 걱정을 했는데 기우였다. 마침 옆자리에 앉아계시던 포켓몬 카드를 모으시는 회사원 아저씨랑 친해져서 사장님과 셋이서 2시간 반 가량 수다를 떨었다. 아저씨는 공무원을 하신다고 하셨는데 나이도 지긋하신 게 상당히 높은 자리에 계신 게 아닌지. 사장님은 95년생 젊은 여성분이셨는데 가게 계산을 하고 나서 3번은 카드 값을 확인했을 정도로 엄청난 미인이셨다. 술 추천도 잘해주시고 사케를 잔으로 팔아서 원 없이 마시고 온 것 같았다. 상당히 마신 것 같았는데 45달러만 나오다니...! 중간에는 자기 뒷산에서 따온 송이버섯이라며 송이버섯 찜도 서비스로 주셨다. 옆에 아저씨도 잘 마신다며 한잔을 사주셨는데 역시 술이 들어가야 일본어가 나오는 것 같다.
1일 차
다음 날은 거의 좀비처럼 다녔다. 아무래도 여러 종류의 술을 섞어서 그런지 아침도 겨우 먹겠더라. 아침은 전날 사장님이 추천해 주신 우동집으로 갔었는데 그냥 그랬다. 첫 사누끼 우동의 인상은 안 좋았던 것으로.. 원래 계획은 오전 8시 배를 타고 섬으로 넘어가는 것이었으나, 아버지도 안 일어나시고 (알고 보니 전날 4시까지 일을 하셨다며..) 나도 죽어가고 해서 결국 12시 40분 배를 타고 나오시마로 이동했다.
13시 30분에 섬에 도착하고, 박물관을 계속 둘러본 뒤, 다시 선착장으로 온 게 15시 30분이니 2시간 만에 싹 돈 것 같다. 섬에 있는 예술품의 대부분이 설치미술이나 공간 그 자체라 either 엄청 여유를 가지고 그 공간을 온몸으로 느끼거나, 안 그러면 쓱 보고 지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애매한 시간에 섬에 도착을 했고, 돌아가는 17시 페리가 만선이 될 수도 있다는 현지 안내인 경고에 빠르게 돌아다녔다. 회화의 경우는 하나하나 주의 깊게 작품을 감상하고 움직이지만 설치 미술의 경우 의미를 알 수 없는 작품들은 바로 스킵하고 넘어갔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아래는 마음에 들었던 작품들의 일부.
무려 1시간 30분 전에 선착장에 도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앞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배 정원이 256명이었는데 결국 추가 배편을 확보하여 남은 인원들을 시코쿠로 보낼 수 있었다. 분명 페리가 만원이 된 적은 없다고 하던데 예술제 기간은 다른 것 같다.
겨우겨우 섬에 도착한 우리는 전철역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저녁을 근처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마침 JR 타카마츠 역이 있는 건물 근처에 우동집이 있기에 우동을 다시 시도해보기로 했다. 결과는 환상적. 타카마츠에서 먹은 4곳의 우동집중 유일하게 재방문한 곳이 되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유명 우동집의 체인이라고 한다. 역시 일본에서는 잘 모르겠으면 대형 쇼핑상가 위층에 있는 식당가에 가는 것이 제일 믿을만 하다. 거의 대부분 전국의 맛집들이 들어와 있고, 관리도 잘 되는 것 같으니 말이다. 우동집 이름은 혼카쿠 테우치 모리야. 본격 수제 모리야이다. 아침에는 해장이 필요해서 가케우동을 먹었으나, 이 가게부터는 면의 맛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자루 우동을 시켜서 먹었다.
이 가게는 바로 튀겨내는 제대로 된 덴뿌라도 주는 곳이었기에 선택했다. 아버지를 맨날 100년된 일본 상위급 덴뿌라 가게에만 모시고 갔더니 아침에 먹은 우동집에서 '티김이 별로다'라고 하시길래 한 선택이다. 개당 1500원짜리를 한 코스 5만원짜리에 비교하시면 안되죠.. 예상대로 엄청 만족해 하셨다. 하나 걱정했던 '국물이 왜 이러냐'는 사누키 우동이 면으로 먹는 것임을 납득을 하셨는지 괜찮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점에도 역시 해장이 필요했었기에 누구보다도 국물이 절실했다. 조개탕이라던가 조개탕이라 던가...
그 와중에도 2차를 놓치지 않고 닭꼬치 집으로 안내했다. 해산물을 맛있게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회는 한국이 더 낫다'는 아버지 말에 방향변경. 중간에 Loft에 들러서 쇼핑을 조금 해주고 근처 닭꼬치 집을 찾아갔다.
2일차
이날의 일정은 리츠린 공원과 온천이었다. 아침 일찍 우에하라야 본점을 오픈시간에 맞춰서 방문했는데 대기가 없었다! 여기도 유명한 우동집 중에 하나인데 평범한 맛. 신경쓰고 먹으면 면이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전날의 우동만큼은 아니었다. 덴뿌라들은 전반적으로 기름져서 썩 좋지 않았다.
아침의 리츠린 공원은 조용했다. 일본의 3대 정원이라 불리운다는데 크기도 크기지만 여름도 가을도 아닌 이 미묘한 계절에 왔어도 볼만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좋았던 것 같다. 자연 경관을 보면 인지 부하를 낮춰준다는 Attention Restoration Theory를 찾아보며 인공 섬과 물이 함께있는 풍경을 보다보니 '아 나도 이런 뷰가 보이는 다도실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탬프 랠리가 있기에 공원을 쫙 돌면서 도장을 받는 재미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잉어가 정말 많았다. 수백 마리는 있지 않을까. 어디를 가든지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밥을 달라고 몰려있는데 조석 작가의 조의 영역이 생각나더라. 조금 무서울 정도.
이후 점심으로는 개인적으로 제일 가보고 싶었던 덴뿌라가 맛있다는 우동집, 치쿠세이를 방문했다. 이곳이야 말로 가장 조사했던 평들과 일치했던 곳이지 않나 싶다. 무난히 맛있는 면과 정말 맛있는 덴뿌라! 가장 많이 먹는 메뉴가 치쿠와랑 계란튀김을 같이 시키는 것이었는데 뭣도 모르고 키스와 치쿠와를 시켰다. 치쿠와는 살면서 먹어본 것 중에 제일 맛있었다. 대체 뭐로 만든 치쿠와이길래 튀겨도 이렇게 맛있지..! 여기도 줄을 선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했었는데 대기 없이 들어갔다. 12시가 되니 직장인들 줄이 5명 정도 잠깐 생겼었던 것뿐.
가와라마치 역으로 돌아온 우리는 자유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나는 그동안 loft와 녹차가게를 방문했다. 정말 오래된 녹차집이라 현지인 대상으로만 영업하지 않을까 했는데 외국인인 내게도 친절히 대해주셨고, 거기서 사온 호지차가 정말 맛있다. 지금도 마시고 있는데 이것도 살면서 마셔본 호지차 중에서 제일 으뜸이 아닐까 싶다.
저녁으로는 호네츠키토리를 다시 먹고 이번에는 온천으로 향했다. 사전에 조사해 둔 온천 중 한 곳이 너무 '현대'적이라 탕도 적고 좁다는 평을 보게 되었다. 댓글을 남기는 방식을 보니 누가 봐도 국밥이랑 탕에 대해서는 평이 까다로울 것 같은 아저씨의 느낌이 물씬 나기에 이름 모를 그이의 평을 믿고 다른 곳인 포카포카 온천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름이 너무 구려서 빼둔 곳이었는데, 실제로는 대성공이었던 것으로.
가장 가까운 역인 오타역에서 상당히 멀어서 (1.6km) 25분 정도 걸어야 했는데,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돌아가는 길은 그래서 우버를 타고 (1,040엔) 돌아왔다. 내부 시설은 충분히 깔끔했고, 시끄러운 관광객들도 없었으며, 탄산수 온천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3일 차
이렇게 안전히 여행을 마무리하고 돌아가는 줄 알았으나... 마지막 날 가와라마치 역에서 소매치기에게 지갑을 털리고 말았다. 살면서 두 번 지갑을 도난당했었는데 모두 일본에서 발생했다. 소매치기가 그렇게 많다는 유럽에서도 별일이 없었는데 말이다. 일본, 치안이 나쁘다! 다행히 이번에는 지갑에 돈을 그다지 넣고 오지 않아서 금방 포기해 버릴 수 있었으나, 혹시 학생 할인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가져온 예일대 신분증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래, 놓아줄 때도 되긴 했지.
총평
기대했던 대로 우동과 섬 관광이 메인인 작은 소도시였고, 호네츠키토리는 정말 맛있었다. 다음에 여행을 온다면 섬을 좀 더 느긋하게 보고 싶기는 한데, 미리 예약이 필수인 것 같다. 또 예약 없이 갔던 미술관들도 그냥 그랬어서 다시 올만한 장소인지는 모르겠다. 우동은 확실히 맛이 있었는데 다른 도시의 장점들을 포기하고 굳이 찾아가서 먹을 만큼은 아니었다. 한 번쯤은 가볼 만 하지만 여러 번 방문할만한 곳은 아닌 장소. 아마 반려가 궁금해한다면 3박 4일 일정으로 한번 더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