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닥을 그만둔 지 두 달이 지났다. 2025년 7월 31일이 마지막 근무일이었으니, 실제로는 두 달하고도 보름쯤 된 셈이다.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 꽤 오래전 일이고, 이후의 삶을 충분히 그려왔기 때문에 지금의 일상이 특별히 낯설지는 않다.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사실이 불안하게 느껴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렇지 않았다. 일이나 사람으로 인해 나를 찾아주는 이들이 많아서 예상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시간적·금전적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건강한 습관을 만들기 어려운지, 왜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게 겁이 나는지, 왜 루틴이 쉽게 잡히지 않는지 자주 생각한다. "백수, 생각보다 어렵고 바빠."라며 친구들에게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마치 '바쁨 불변의 법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제는 하지 않아도 될 생각들로 머릿속은 여전히 쉴 틈 없이 돌아간다. 두 번째 포닥 라운드를 기다리며,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긴 방학을 보내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일상 업무에 치이다가 갑자기 시간이 '턱' 하고 주어지니, 자연스레 삶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남자는 50대가 넘으면 호르몬 문제로 두 번째 대격변을 맞이한다는데, 나는 조금 일찍 그 과정을 경험하는 기분이다. 가장 근원적인 질문은 결국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였다. 나를 과학자의 길로 이끈 원동력이자, 수많은 취미의 근원이자, 올해 초 잠시 잃어버렸던 바로 그 ‘좋아함’의 문제다.
하고 싶은 일과 좋아하는 일들을 나열하고, 왜 하고 싶은지, 어떤 점이 좋은지를 Obsidian에 정리해보았다. 예전에는 좋아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들도 내 호오(好惡)가 나아갈 방향을 알려줄 단서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곧 결혼을 앞두고 유부남들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하나같이 "네 취미용품을 미리 사둬라. 심지어 앞으로 네가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는 취미용품까지 말이야."라고 말했다. 미래의 '좋아함'까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인생의 선택도 조금은 더 현명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좋아했던 다양한 취미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연구를 하며 늘 고민하던 프로젝트 관리 문제를 해결해보기 위해 이번에는 Trello를 다시 꺼내 들었다.과거 스타트업에서 일하던 시절 여러 프로젝트 관리 도구를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처음 만난 서비스다. 당시에는 삶도 회사 일도 지금보다 훨씬 단순해서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 기능이 꽤 마음에 든다. 아래는 개인 작업용 보드의 스크린샷이다.
미뤄두었던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을 하나씩 마무리하고 있다. 작게는 늘 마음에 걸렸던 서랍장을 고치는 일부터,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제품 설계, 가족을 위한 제작 프로젝트까지,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해냈다. 내가 만든 것들로 인해 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금 '타인으로부터 존재의 의미를 인정받으려는 성향을 지닌, 참 귀찮은 인간'임을 확인했다. 이후에 진행할 연구도 세상에 미칠 긍정적 영향력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비자 프로세스는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고, 다음주에 건강검진을 앞두고 있다. 이 여유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 불안하지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후회없이 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