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을 혼자 보내는 방법.

아침의 늑장은 대게 이유가 있는 법이다. 누군가는 원래 아침은 체질상 약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과연 그도 소풍 전날, 새벽 비행기 타기 전날 보통날처럼 늑장을 부릴까. 약속이 없으며, '쉬는' 일정조차 없는 일요일. 전날 11시에 누웠음에도 불구하고, 8시에 이미 깨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동 조명 장치가 8시 45분에 맞춰 모든 불을 켰음에도 불구하고, 오후 2시가 되어서야 침대에서 기어 나올 수 있었다. 


창문을 너무 오래 닫고 있어서 산소 농도가 떨어졌나 하고 손목의 스마트 워치를 봤지만 디스플레이에는 높은 산소 포화도가 적혀있었고, 바디 배터리 값은 4시간 전부터 100%를 유지하고 있었다. 자취 초반에는 이러한 일이 익숙했다. 그 당시 연애를 하지 않아서도 있었겠다만 통학으로 버려진 시간만큼 하루가 길어져 주말에는 이렇다 할 일이 남아있지 않았다. 


세수를 하면서 냉장고 내용물을 기억해내며 아침을 결정, 감동란 두 알과 베이컨, 토마토 주스다. 이정도 메뉴면 평상시 아침에 비해 과하게 호화로운 편. 아 점심이니 딱히 그렇지도 않으려나. 전날에 설거지하다 남긴 식기를 정리하며 아침, 아니 점심을 같이 준비했다. 


'늑장의 이유는 역시 커피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막기 위해 식사 후 커피부터 내렸다. 저 우악스러운 커피콩 가는 소리는 알람시계 대용으로 써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필터지와 드리퍼를 준비했다. 핸드드립 주전자는 팔을 끝까지 뻗어야 닫는 위치에 있으니 쓰지 말자. 팔을 반의 반만 뻗은 위치에 있던 전기포트의 물을 바로 담아 아침커피를 내렸다. 그래, 먹은 것은 점심이지만, 커피는 아침커피이다. 


어제부터 필터가 막혀 작동을 멈춘 수족관 여과기를 청소하고, 일주일치 옷들의 다림질을 마치고 화장실을 호텔처럼 바꿔두니 3시 5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을 위해 넣어둔 샴페인을 누구랑 마실까 생각을 하다가 불렀을 때 올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책을 한권 가방에 우겨넣고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일요일을 혼자 보내는 방법. 정말 어려운 주제이다. '일요일을 보내는 방법'과 '혼자 시간을 보내는 방법'의 두 가지가 겹쳐졌으니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요일이 아닌 날에는 일요일을 보내고 싶어하며, 약속과 연구 미팅이 잡힌 당일에는 막상 혼자있고 싶어하는데 이 두 가지가 합쳐지니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마치 민트초코마냥 둘이 섞이니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르겠지만) 기어오는 혼돈이 탄생했다.


이럴 때에는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러간다고 변명이 되는 서점이 최고다. 저녁 식사도 같이 외부에서 마칠 생각이었기 때문에 강남 교보문고를 선택했다. 역 근처 일본 스파게티 집에서 리조또를 먹고 서점으로 향했다. 요리에 나왔던 향신료를 찾아보고 싶어서 요리책 코너를 서성이다가 결국 미스테리/스릴러 서적 코너에 종착했다. 얼마 전 배송비를 아끼기 위해서 함께 구매했던 책이 매대 위에 올라와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의 탁월한 선택에 실웃음을 짓고 산 책과 죽은 책의 비율을 잠시 생각한 뒤 빈손으로 카페를 찾았다. 


마음 같아선 최근 참여하게 된 TRPG모임 사람들과 게임도 하고 맥주도 같이 마시고 싶었는데 지금이 딱 시험기간이라 그런지 다들 여유롭지 않은가보다. 시험 전에 모임을 한번 잡아보려고 운을 띄웠으나 펌블이 나와버렸다. 다음에 시험 끝난 누군가가 방을 살릴 때까지 조용히 있어야겠다.


할일은 많지만 10월 10일 일요일을 다른 무언가를 하기 위한 날이 아니라 순전히 일요일 그 자체로 즐기고 싶었다. 결국 남은 것은 책 세 챕터를 읽은 것과 이 글 뿐이지만 IT 정보만 가득한 죽 같은 블로그에 감정 한 조각을 올렸다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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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nowblesse